1996년, 나의 첫 번째 온라인 세상 (1)

(단순 텍스트와 모노 그래픽이 만들어낸 소통의 공간)

2025년 6월 2일


“그때 나는 몰랐다. 내가 만든 그 어설픈 홈페이지가 27년 후 터미널 화면 위에서 마크다운으로 나의 삶과 신앙을 소통하는 글 중 하나가 될 줄은…”


1996-1998년, 하이텔 전용 단말기와 14.4k 모뎀의 세계

고등학교 재학 시절.
내 책상 맨 구석에는 하이텔 전용 단말기가 무려 두 대나 놓여 있었다.

출처: 근대통신박물관 소장 · HiTEL 하이텔단말기 HVT-300M (1992, 현대전자)

“띠디디디…”

Dial Up 모뎀이 내는
그 시끄러운 협상음.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원시적이었지만,
그 소리가 들리면 “연결되고 있다!”는 설렘이 밀려왔다.

“01410” 혹은 조금 더 고속 회선을 지원했던 “01411” 접속 번호를 다이얼하고,
협상음이 끝나면 나타나는 텍스트로 가득한 화면.

하이텔에 접속되었습니다.
ID: 
PASSWORD: 

지금 터미널을 열었을 때 나타나는 그 프롬프트와 똑같았다.

참고로 1996년부터 1999년까지는 한국에서 인터넷 접속 방식이 전화 접속 모뎀에서 초고속 인터넷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다. 나는 조금이라도 쾌적한 고속 온라인 소통 환경을 위해 28.8k, 56k 모뎀으로 차근차근 업그레이드했다. PC 보급율이 점차 높아짐에 따라 내 방에 두 대나 있던 통신 전용 단말기는 점점 잊혀져 갔다.


PC통신 동아리, 얼굴 없는 텍스트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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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_

하이텔의 PC통신 동아리에서
나는 처음으로 “온라인 커뮤니티”를 경험했다.
(후일엔 ‘나우누리’, ‘천리안’, ‘유니텔’로 확장…)

얼굴을 모르는 사람들과
오직 텍스트로만 소통하는 신기한 세상.
비록 차가운 글자들이었지만,
그 속에는 초기 온라인 소통의 순수한 열망과 아직은 따뜻한 마음들이 숨어 있었다.

동호회 게시판에 글을 올리고,
댓글이 달리기를 기다리던 설렘.

낯선 사람과 채팅방에서 느꼈던 어색함.
(처음엔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다 접속을 끊었던 기억이 난다.)

텍스트 기반 소통의 순수함.
외모나 목소리에 의존하지 않는 순수한 생각의 교환.

이상하게 나는 화려한 그래픽보다 그런 원시적인 느낌이 좋다.


1996-1997년, IYAGI, 그리고 도스의 마지막 황혼

하이텔에서의 텍스트 소통이 익숙해질 무렵, 집에서는 또 다른 텍스트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이야기 5.x”와 “이야기 7.x”.

출처: DOS 프로그램 저장소

도스 환경에서 피어난 한글의 꽃

C:\IYAGI>

검은 화면에서 이야기를 실행하면,
갑자기 파란 바탕에
하얀 글자들이 나타났다.

하이텔 통신 전용 단말기는
컴퓨터도 아닌 것이 온라인 접속을
가능하게 만들어 준 신비한 녀석이라면,
‘이야기'(IYAGI)는 PC를 통해
더 예쁘고 다양한 기능을
구현해 주는 다재다능한 프로그램이었다.

이야기 6.x가 나왔을 때의 그 설렘.
“와, 이제 더 많은 기능이 생겼네!”

“삐이이- 삐삐빅- 치이익- 드르륵…”

어둠이 살짝 내려앉은 저녁,
방문을 닫고 컴퓨터 앞에 앉으면
온 신경이 전화선에 집중된다.

“이야기”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단축키로 저장해둔
PC통신 서비스 번호를 누르면,
모뎀은 기묘한 소리를 내며 접속을 시도했다.

“atdt 01410” (엔터!!)

성공적으로 연결되었을 때
화면 가득 펼쳐지던
파란 바탕의 텍스트 메뉴들은
언제나 나를 설레게 했다.

손가락은 분주히 키보드 위를 오갔다.
/go Plaza나 /go chat 같은 명령어를 입력해
게시판과 채팅방을 찾아다녔다.
자료실에서는 귀한 유틸리티나
게임 데모 파일을 내려받기 위해 몇십 분,
때로는 한 시간이 넘는 시간을 전화 먹통으로
어머니께 꾸중을 들어야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전화 요금을 직접 부담할 필요가 없었던 철부지 고등학생의 전형적인 모습이랄까.)
나중엔 끊김 없이 통신을 하기 위해 전화 회선을 하나 더 증설했다.

.arj나 .zip으로 분할된 파일들을 하나하나 받아 압축을 풀 때의 그 설렘이란!
지금이야 수백 기가 파일도 순식간에 내려받지만, 당시는 200MB 파일 하나 받는 데도 몇 시간이 걸렸다.


윈도우 환경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혼란

하지만 그때는 혼란의 시대이기도 했다.
윈도우 95가 등장하면서 GUI 환경이 대세가 되어가고 있었고,
한글과컴퓨터에서도 윈도우용 한글을 내놓고 있었다.

“이야기를 계속 쓸까, 아니면 윈도우용 프로그램으로 갈아탈까?”

많은 사용자들이 고민했던 그 시절.
그러나 익숙한 도스 환경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이야기 5.x에 익숙했던 기존 사용자들은
새로운 버전의 복잡한 기능들보다는
단순하고 빠른 옛 버전을 선호하기도 했다.


이야기 7.x, 도스 시대의 마지막 불꽃

출처: DOS 프로그램 저장소

1997년경 이야기 7.2가 나왔을 때,
나는 어느 정도 윈도우 환경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도스로 부팅해서
가끔 이야기로 돌아가곤 했다.

“역시 구관이 명관!”

멋지고 화려한 윈도우 프로그램들에 비해
이야기는 순수하게 글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주었다.
지금 내가 투박한 도구들과 마크다운을 선호하는 이유와 같은 맥락이다.


그때는 몰랐던 소중함

물론 불편함도 많았다.
어머니의 “전화 좀 그만 써!” 하는 호통은 기본이었고 (그 목소리가 너무나 그립다), 엄청난 전화요금 고지서를 보며 눈치를 봐야 했다.
누군가 전화를 쓰는 바람에 접속이 끊기면 허탈감에 한숨을 쉬기도 했다.
느린 속도 때문에 이미지 한 장 보는 것도 큰 인내심을 요구했고,
대부분의 정보는 텍스트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당시 PC통신은 나에게 소중한 경험이었다. 키보드 자판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배우고, 다양한 사람들과 생각과 감정을 나누며 직접 만나며 온라인 커뮤니티라는 것을 처음 경험하게 해주었으니까.

“이야기” 프로그램의 파란 화면은 지금의 화려한 인터넷 세상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그 시절 내가 느꼈던 설렘과 순수한 낭만은 어떤 최신 기술로도 대신할 수 없는 값진 추억으로 남아 있다.

가끔 그 시절 모뎀 접속음이
환청처럼 들려올 때면,
왠지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아련해지는 느낌이 들고는 한다.

그것이 바로 내가 통과해 온,
빛바랜 디지털 추억의
한 페이지기 때문일까…

그때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는 것.
그것들을 떠올려 본다.

그때 그 단순하고 빠른 글쓰기의 기쁨을
지금도 다시 찾고 있는 2025년의 나에게.



다음 글 예고: “1998년, 나의 첫 번째 온라인 세상 (2)”


— Sojourner, 옛길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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